아마 꿈을 꿀 거야. 하늘을 나는 꿈. 꿈을 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구름이 생각났을 뿐이지만. 아마 날개는 없을 거야.
훌쩍 떠나간 네 뒤로 남겨진 나도 훌쩍
적시며 살고 싶단다. 실수로 쏟는 비에 우산을 내릴 용기.
말 한 마디에 꽃 한 송이 꽃 한 송이에 맘 한 움큼 맘 한 움큼에 깊 은 시선 깊 은 시선에
마주하기 위해 머리를 처박습니다. 발바닥이 시려올 때면 노을이 솟아오릅니다.
흰 종이 하나 하얀 눈 그려보자 동글 동글 동글 동글 동글 동글 동글 동글 내 마음 잔뜩 담은 빈 종이 하나
소복이 내리는 것이 행복은 아닐 겁니다. 우직이 내리는 것이 눈물은 아닐 겁니다.
따스한 손 시린 마음 품었답니다. 그녀의 말 마음이 못다 품은 온기랍니다.
어느, 날 덮친 하늘에 손가락을 폭 깎지 않은 손톱 탓에 콕 새어드는 노을이 따끔
촉이 뭉툭하고 시위가 날카로운 활 하나 아얏
뾰족하며 포근하고 그리운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못’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우산 하나 있습니다 나 겨우 가릴 정도의 내밀 용기 있습니다 건네보지 못한 비가 온다고 합니다 아주 경쾌한
그래서 너무 맑고 청량한 사람과는 안맞아요 내 머리속에는 노을이 떠있는데 그들은 365일 태양이거든요 내 뒤에 그림자가 지는줄도 모르지
아프다는 것은 박힌 돌이 빠졌을 때겠죠 요즘은요 박힌 적 없는 것이 날 힘들게 해요 이번엔 내가 돌이었나 봐요
3동 805 호 정방형 창문. 마치 정답이라는 듯.
비 온 뒤 맑음 해 온 뒤 흐림 로망을 가르치기 좋아하는구나.
날 저주하지 말아요 가장 소외된 이곳에서 누구보다 꿋꿋이 존재하는걸.
그건 아마 꽁무니를 좇는 꼴
어제 비는 나무가 가리고 오늘 비는 나무가 나린다.
후두둑 후두둑 내가 내립니다 하릴없이 지면을 향하는 나는 햇님을 깨우러 갑니다
콜콜콜 쫄쫄쫄 미지근한 것을 내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구나
"폭" 하는 소리가 무섭지 않니 용감한 거니 꽃이 꽂힌 거니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읒 키읔 티읕 피읖 히읗 날 기역해줘.
다음 생에는 달이 될래. 달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이들 그 많은 바람들이 이루어졌다면 오늘의 저 달은 누굴까. 안녕
노랗게 일렁이는 눈동자 속 푸른 시선을 너라면 알까
봄이 왔다. 그저 왔을 뿐, 내가 봄에 있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터덜 터덜 출근길 뚜벅 뚜벅 새근 새근 꿈나라 꾸벅 꾸벅
밖으로 나오래요 아름다운 게 잔뜩 있대요 고개 쏙 내밀면 넓은 세상이 있대요 하지만 그젠 알 수 없겠죠 이 구멍의 깊이 웅덩이의 넓이 벽의 주름과 새겨진 흠집들 여기 있을게요.
그렇게 흘겨진 눈길에 밟힌 차분히 놓인 목제 가구와 부드러워 보이는 카펫 그러다 문득 어떤 향이 날까 하는 순간 창밖을 맴돌던 발걸음이 문을 박차게 되는 것.
누군가는 '해'라 부르더라 그 어깨 위 사뿐히 눌러 앉았기 때문일까 누군가는 '달'이라 부르더라 벅찬 마음 모자람 없이 담았기 때문일까 누군가는 '별'이라 부르더라 두 눈에 작은 반짝임 되었기 때문일까
리빙 코랄이라는 글을 쓰며 처음 알게된 그녀의 sns에는 오렌지빛 사진들이 가득했다. 아직은 얕은 우리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뻗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인연' 이라고 부를 이유로는 충분했다.
고통이 비명을 낳듯. 자극은 늘 무언가를 낳는다. 아무 자극 없는 요즘. 무엇도 낳을 수 없는.
어쩜 영원히 18년일지도 어쩜 오늘은 17년 12월 393일 쯤일지도 곧 12월 32일이 올 것 같다.
네 행복을 위해 살기로 했다. 그곳에 내가 없대도 괜찮아.
선입견은 쉽게 가지되, 판단하기를 어렵게.
홀려 한 겹 한 겹 헤치다 다 벗겨버림 어쩌나. 해서 닳도록 보기만 하다.
겨울과 함께 봄이 왔다 낯선 온도에 어쩔 줄 몰라 하다 감기에 걸렸나 보다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이벤트 예쁜 케이크 위에 초 대신 베일 듯한 달 밑, 우울한 형광등. 하나 둘 셋 후-
두껍게 뱉는 한숨 즐겨 듣던 노래로 가려지지 않아 그래. 자장가. 자장가를 불러주세요.
정곡을 찌르는 것은 어쩜 상해다. 따지자면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행위쯤 되지 않을까. 후벼파는 데서 오는 짜릿한 그 희열은 누군가의 가슴팍을 뚫어낸다는 것을 잊게끔 한다. 말 끝에 힘을 싣고 그 끝은 날카롭게 하여 도달하기를 예리하게 하는 것은, 내가 가진 지식의 힘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자.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몇 희열들은 일방적인 때가 많다.
저녁달과 거짓 사랑을. 곧. 아침해와 이별을.
행여 곰을 만난다면, 열고 지나가세요.
-중략- 정의로운 영웅이 나타났다. 하늘의 기운을 모두 빼앗은 듯, 푸르게 빛나는 영웅의 검이 그것을 '북' 하고 갈랐다. 무색(無色)인 그것의 상처를 헤집고 나오는 시뻘건 액체와 비명만이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 무색을 '악마'라 불렀다. 무색(無色)의 자식이 그의 소식에 묽게 울었다. 두 팔과 다리를 가누지 못 하고, 무기력함에 빠졌다. 목 놓아 울며, 투명한 눈물을 흘렸다. 붉게 물든 것은 그의 촉촉해진 눈망울과 두 주먹뿐이었다. 마치 사람처럼. 악마가 나타났다. 하늘의 기운을 모두 담은 듯, 푸르게 빛나는 눈물로 쥔 붉은 주먹은 '쿵' 하고 대지를 갈랐다. 대지의 상처를 메우는 사람들의 시뻘건 피와 눈물은, 악마의 주먹이 무색하다 할 만큼 붉었다. 무색의 자식은 붉게 물든 그것들을 '악마'라 불렀다.
사람은 잊혀지면 죽는다고 해요. 난 죽은 걸까요. 애초에 기억된 적이 없다면요. 난 살았던 걸까요. 누군가 사랑해주세요. 태어나 볼게요.
언젠가 한 번쯤은 따뜻한 겨울이 올까요. 여름마저도 춥게 보낸 저인데 말이에요.
" 답게 가 아닌, 스럽게."
생각을 해보니 나도 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슬슬 졸업 전시를 하겠구나. 비록 후회 없는 결정이지만, 그렇다고 미련이 남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꿈에 그리던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학사모를 쓴 나의 모습. 평생 붓과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그려온 나인데, 그런 상상 속 나의 모습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웃기는 일이다.
낙엽과 눈덩이 사이에 살포시 떨어진 꽃 한 송이가 활짝. 모든 게 시들어가는 계절에 이리도 밝게 빛나는 너를, 나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글을 쓰겠다고 만든 블로그인 만큼, 영화나 전시 리뷰는 하지 않겠다고 정했었다. 나에게 늘 큰 영감이 되는 매체들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배제하는 이유는, 어딘가로부터 자극을 받은 감상이 아닌 내가 누군가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주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욕망은 기존의 틀과 질서를 붕괴하기 마련.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 "Ryuichi Sakamoto : LIFE, LIFE"는 창작 글만을 올리겠다는 나의 의지를 무겁게 뚫고 들어온 욕망이었다. 다만 그 자리를 쉽게 내주기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세운 벽이 아니었기에, 나만의 방법으로 포장한 뒤 들여보내기로 했다. 그의 전시는 어제(14일, 일요일)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음악과 미술을 늘 양손에 쥐고 살아온 나에게 적지 않은 의미로 자리 잡은 무언가였지만, 전시는 이제 없다. 하지만 그의 '소리'에 대한 열정은 이 세상 곳곳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에 나는 기록하려고 한다. 그의 전시가 아닌 그가 남긴 '소리'를.
만약 구름이 객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도 그런 게 멍하니 구름을 보고 있자면 요놈은 조금 땡글땡글한 게 어제 먹은 귤을 닮았고, 조놈은 커다랗고 정돈된 느낌이 없는 게 오늘 아침 내팽개치고 온 내 이불 같은 걸. 내가 본 것들에 하나 둘 별자리 마냥 모양과 이름을 붙여주다 보면, 어느 가까운 미래에 "안녕! 전에 보았던 녀석이구나. 오랜만이야." 하며 반갑게 인사할 수 있지 않을까.
진심은 통한다더라. 소중한 마음 고이 포개안고 전달하면, 그 끝은 분명 빛날 것이라더라. 그런 믿음이 되려 너무 굳세었던 탓일까. 소중히 가져간 그 마음, 다급한 맘에 '푹' 하고 찔러 넣어 버렸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그곳에, 구멍 하나 남지 않았다. 포개안고 갔던 마음, 꽂힌 데 없다.
옷깃 한번 스쳐요. 날이 맑은 날에요 좋아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어느 날, 어느 때일지 모르겠지만. 문득 보고 싶은 그 날. 우리 옷깃 한 번 스쳐요.
그를 만나는 날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는다. 예쁘게 단장한 내 머리 위엔 하늘이 없다.
"이렇게 까먹은 말들은 어디로 갈까?" 18년 3월 3일에 했던 메모다. 친구와 얘기하다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받아 적은 메모. 가끔씩 어떠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 안에서 자리를 비울 때, 그 행방은? 이라는 귀여운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나눈 친구가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까먹은 기억은 어디로 갈까.
사람은 지혜를 얻고 지식을 알기 이전에 자연을 가장 먼저 곁에 두고 배웠다. 때문에 우리는 지혜처럼 현명할 수 없고 지식처럼 분명할 수 없으며 자연을 닮아 변칙스럽다. (때로는 변덕스럽기까지). 그렇게 생겨난 자연을 닮은 것들은 후에 '인간미'라는 지식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나는 이를 사랑한다. 변칙과 변덕은 내가 보고 자란 세상에서 늘 존중받지 못했다. 다르다는 틀리다로 치환되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틀려먹은 것들은 배제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다른 것을 멀리하며 안전을 추구하는 습성마저도 자연을 닮은 것이며, 그래서 또한 사랑한다.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연을 말하는 것은 진공관 안에서 열심히 울리는 음악 같은 것일까. 아마 반항과 같은 것이리. 곧 틀리다로 치환될 목소리며, 배제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무엇을 닮아 쉽게 떨어지지 않고, 쉽게 메마르지 않으며, 쉽게 부서지지 않는 자연이다. 이 울림 없는 외침의 끝이 꼭 깊은 녹(綠)에 다다르길.
여름의 하늘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세상 아름다운 것들은 가까이하기 힘들구나. 뜨거운 열기에 쉽사리 쳐다보기 힘든 것이, 품기 아름다운 어려움 이구나.
이 더위 아래 모든 것들은 말라비틀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척박해진 곳에 싹이 돋았다. 겨우 고개를 내민 것이 설마 열매를 맺겠냐마는, 세상 모든 기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태어난다더라. 이 간절한 마음, 혹여 비바람에 허우적거릴지라도 그대가 있는 그 먼 곳까지 꼭 도달하기를. 혹시 모르니까.
어제 본 달이 그렇게 예뻤다. 딱히 순수해진 마음을 껴안고 집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조금 따뜻해졌었나 보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나한테 있는 건 뭘까 ?' 하고 묻던 그녀에게 내가 품고 온 달을 안겨주기로 했고, 그 짧은 글귀에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데 달보다 더 예쁘더라. "달이 예쁜 7월 30일 새벽 2시". 그리고 감사함을 주고받은 그 순간. 나와 그녀 모두 틀림없는 달 부자였다.
내 앞의 적이 거대하고 무섭다면 피해야 할까?. 주먹 불끈 쥐고 박을까?. 아니면 빙빙 돌며 약점을 찾아야 할까?. 20여 년, 길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느낀 점은, 피해 도망가면 돌멩이를 밟고 넘어지기 마련이었고, 강하게 내리치면 내 손만 아팠고, 적들은 약점을 내어 줄만큼 만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를 반복하며 찾아낸 파해법은 '나만의 도구를 찾고 그 사용법에 대해 탐구를 하는 것' 이었다. 내가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를 찾아내고 나니 피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능한 것들이 헤쳐나갈 수 있는 난제로 바뀌어있더라. - 당신의 두 손에 꼭 쥔 것이 불구덩이는 아니냐고 묻는다. 아니, 빛나고 아름답다 하여 무심코 쥐었는데 두 손이 나뭇가지는 아니었냐고 묻는다. 만약 무언가 꽉 쥐고 흔든 것이 되려 나를 불안하게 하여 놓치게 만들었다면 잠시 내려놓아도 된다. 그런 뒤에 우연히 집게 된 것이 비록 무기더라도, 비록 거칠게 다루더라도, 나만의 도구가 된다면 상대방에게 살포시 떨어져 녹아내리지 않을까.
한때, 바닥을 보고 걸었다. 그 앞에 무엇이 닥쳐올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부딪히기보다는 넘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다르게 느껴지면 틀리다 말하고, 위협이 가해지면 도망치듯. 나는 안전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덕분에 앞을 바라보며 내딛던 때보다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때였을까. 안전함은 편안한 신발보다는 벽을 두른 것과 같아 나아갈 길을 막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때문에 이제는 바닥을 보며 걷지 않는다. 안전함을 취했던 내가 무언가를 감수할 줄 알게 됐다는 아름다운 경험이 아닌, 이제는 밑에 무엇이 깔려있는지 잘 아는 나를 믿고 주변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흉터를 어루만지는 이야기다. 세상에 안전한 길은 없다. 하나같이 가시밭길이며 조금 벗어나면 불구덩이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늘 다른 길을 탐하기 마련이고 떠난 후에야 꽃길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걷는 길이 꽃길인 것을 알든, 혹은 다른 곳에 분명 꽃길이 있다 하고 여행을 떠나든, 중요한 것은 살짝 고개를 들어 내 앞에 노을 진 하늘이 아름다운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
호불호가 갈려 한참을 안 쓴 향수를 뿌렸다. 여느 때와 같은 오늘이었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가방을 오랜만에 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최근에 사랑하게 된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출근 준비를 했을 뿐. 그뿐이다.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피했던 향을 몸에 품고 출근하는 길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나보다는 남을 생각했던 내가 이제는 나를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됐다는 증거겠지. 빠르지만은 않은 나이에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요새의 오늘은 행복하기 그지없고 힘이 난다. 호불호가 갈려 한참을 안 쓴 향수를 뿌렸다. 여느 때와 같은 오늘이었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이제는 누군가와 이 향을 나눌 용기가 생겼고, 그저 그뿐이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결국 매듭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재미난 점은, 사람은 매듭과는 다르게 굳이 양쪽이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본 그대들 중 하나라도 먼저 한 걸음 내디뎌 이해라는 발자국을 남긴다면 보기 좋은 결과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발돋움이 만약 포기였다면 언젠가 관계는 후들거리게 되지 않을까. 다만 서로 같은 곳을 향해 바라보고 함께 발자국을 남긴다면 보폭, 속도, 크기 등 그 무엇이 다르더라도 분명 매듭은 강하고 질길 것이라. 먼저 다가서는 '하나'가 될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둘'이 될지는 매 순간 빠짐없이 주어지는 선택지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둘 역시 '하나'라는 것이며 정답은 없다.